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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만화 가게를 찾아 온 낯선 손님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11월 호에 실렸습니다. (바로 가기)
* 게재본은 본 글과 다를 수 있습니다. 

청탁을 받고 고민 좀 했습니다. 시간도 부족하거니와 버겁다 싶더군요. 그런데 사실, 너무 오랫동안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들이 없었죠. 한 때는 참 많이들 얘기했는데 말이죠. 조금 어설프고, 빗나가더라도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조금 아쉬운 글이 된 듯 합니다. 후속 글을 써야하지 않을까 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쓸지는 아직. 여하튼. 글이 좀... 깁니다. 아이고.



<옛날 만화방 : 출처 정상혁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crazyemp>


한국 애니메이션은 왜 이제야 성공했나?

2011년 한국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괄목한 만한 성과를 낳았다. 6편의 작품이 개봉하고, 1편이 개봉 대기 중이다. 그 중 <마당을 나온 암탉>은 210만 관객을 동원했다. <소중한 날의 꿈>과 11월 3일 개봉한 <돼지의 왕>은 흥행과 별개로 ‘소장할 만한’, ‘2011년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를 받으며 비평적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한국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90년대 이후 애니메이션은 고부가가치를 낳은 산업이라는 기대 속에 막대한 국가적 사회적 자원이 투자되었다. 유사한 시기를 거치며 영화와 방송, 게임과 가요는 산업적 틀을 구축하며 한류의 대표 상품이 되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그렇지 못했다. <뽀로로>라는 걸출한 사례가 탄생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TV 애니메이션이며 독보적인만큼 예외적이다. 몇 몇 예외적인 작품들을 제외하고 보면 극장에서는 사실상 20년 만에야 성과를 보인 셈이다. 

2011년 가시적 성과를 낳은 세 작품은 한국 애니메이션계가 수립한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 유니버셜한 스토리와 문법, 스타일. 정확히 헐리웃 스타일. 아동 혹은 가족 타켓, 글로벌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국제 합작을 필수로 할 것. 그러나 <소중한 날의 꿈>과 <돼지의 왕>은 아동용으로도, 가족용으로도 적당치 않다. 가족 관객을 불러들인 <마당을 나온 암탉>은 그러나 각색과 연출을 통해 상당 부분 털어냈음에도 원작의 어둠이 여전히 짙다. 헐리웃 스타일과도 거리가 있고, 국제 공용의 스토리라 하기엔 머뭇거려진다. 게다가 세 작품 모두 국내 자본과 제작진에 의해 만들어졌다. 애니메이션은, 적어도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왜 이제야, 이런 방식으로 성공한 것일까?


대중문화는 어떻게 재발견되었나?

80년대까지 영화와 애니메이션, 만화, 가요와 방송 드라마는 ‘쟁이와 딴따라’들이 만들고 우매한 대중들이 ‘흥미와 오락을 위해 여가 시간에 즐기는 여흥’꺼리였다. 창작자들과 적극적인 수용자가 대중문화/예술로서의 가치를 인식했을지라도 사회적인 인식은 그랬다. 문화적 자주성은 예외적 언급이었고, 외화벌이가 방어막이었다. 문학도 순수문학과 구분되는 대중문학은 미약하기도 했거니와 사회적 평가에 있어서는 언제나 옹색했다. 이런 상황은 80년대를 거쳐, 결정적으로 90년대에 들어 국가적으로 변화한다. 

90년대 한국 대중문화는 ‘재발견’되었다. 먼저 영화와 애니메이션, 만화 모두 오락 혹은 예술과는 구분되는 산업으로 재인식된다. 시장이 개방되고, 정부는 사회적 자원을 동원하여 진흥을 시작한다. 자본 역시 수익 달성을 목표로 투자를 시작한다. 대중문화는 이제 세계(화) 속에 자리 잡고, 국가 간 경쟁 속에 있는 산업으로 인식된다. 동시에 대중문화는 세계 속에서 우리를 구분 짓는 ‘문화’이자 ‘예술’로서의 ‘상징가치’까지 획득한다. 이제 사람들은 개별 문화 상품의 성패를 물질적 부와 상징 자원의 차원에서의 국가적 성과로 인식한다. 한류를 자축하고, 영화제 수상에 뿌듯해하고, 기록적인 흥행을 위해 스스로를 동원한다. 그렇게 대중문화는 ‘딴따라와 쟁이’들이 만든 ‘오락거리’에서 산업이자 문화이며, 예술로서 재발견된 것이다. 

결과 영화와 방송, 가요 그리고 게임은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산업이 되었다. 상업적 가치에 국한되지 않는 상징적 가치는 ‘콘텐츠’라는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단어를 통해 포괄되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이 대열에서 탈락했다. 

애니메이션도 한 때 상업적으로 성공한 적이 있었다. 60년대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있었고, 70년대 후반 SF 애니메이션 붐을 일으킨 <로보트 태권V>가 있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한국 애니메이션은 적어도 장편 애니메이션에 관한한 예외적인 몇 편의 작품이 전부다. 이는 ‘산업’으로서의 실패만이 아니라, 다른 문화 영역이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며 획득한 ‘문화’와 ‘예술’이라는 상징 가치 역시 획득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일반적인 답변은 하청 기지라는 토대와 스토리와 기획력의 부족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려하지 않고, 구매하지 않는 관객과 시청자, 소비자들. 그리고 애니메이션은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언급하는 것이다. 또 이런 상황은 다시 산업‘화’의 실패 탓으로 귀결되어 해석은 순환구조를 이룩한다. 그러나 산업과 문화, 예술로서 정립하는데 성공한 다른 문화 영역들과 비교할 때 애니메이션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그냥 저급한 것만이 아니라 ‘아이들 것’이다. 다른 문화 영역들이 질 낮은 오락거리로 불릴 때도 비록 소수의견일 망정 그것을 당당한 문화로 예술로 봐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했으며, 우리는 아닐지라도 서구에서는 각 문화영역은 문화요, 예술이요, 산업이었으며 내국인들 적어도 지식인-엘리트 집단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는 고급문화가 대중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쉽사리 말하지 못한다. 나아가 각각의 문화 영역과 장르에 대한 가치 평가가 내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문제기도 하다는 것 역시 이해한다. 사회 계급과 계층은 각각의 문화영역과 장르들에 대한 취향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타 집단과 구별 지으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재생산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문화는 구별지워진다.1)  따라서 애니메이션이 왜 대중문화 내부에서도 차별적인 영역이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재적 속성 이외 것도 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 90년대 이전으로 가보자.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출발부터 규정되어온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인식을 살펴보자.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금 다른 곳을 검토할 생각이다. 

1) 삐에르 브르디외, <구별짓기> 2003





만화방에는 정말 아이들만 왔을까?

만화하면 떠오르는 만화방은 1950년 중후반부터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1957년 서울 지역에 200개 정도였던 만화방은 60년대 들어 본격적인 늘어나 78년에는 전국 2만 개소에 달하게 된다.2) 그러나 만화방은 탄생초기부터 비난의 표적이었다. “불량한 만화가 (62년 현재 서울) 시내 700여개 만화 가게에 번져있고 사실상 모든 어린이들이 이 거리의 도서실에 매일 같이 드나들고 있”다며 당국의 단속과 검열을 촉구한다.3) 공권력에게 만화방은 “소년범죄의 온상이 되는” 곳으로 단속 대상이 된다.4)
 
그러나 어린이들이 드나들고 불량만화를 통해 소념범죄에 빠져드는 만화방에는 아이들만 찾은 게 아니었다. 만화방에는 소설도 있었고 그 중 90%는 무협지와 애정소설이었으며 성인만화까지 비치되어 있다.5) 한 언론인은 “(60년대 후반) 어른들이 들어와서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는다. 어린이들이 성인만화를 안 읽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이냐고 질타한다.6) 게다가 만화방에는 읽을거리만 있던 게 아니다. 당국의 단속 대상에는 TV도 있었다. 만화방에서 사람들은 유료로 TV를 관람했고, “여로” 같은 인기 드라마라도 나오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니까 70년대 전 후 만화방은 아동과 청소년만이 아니라 성인만화와 무협소설, 월간 대중 잡지을 보기 위해 성인들도 찾아오는 공간이었고 때로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서민들의 문화 사랑방이었던 것이다.7)  그런데 왜 만화방은 아이들의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을까? 왜 당대 언론들은 애써 만화방을 아이들의 공간으로 인식하며, 성인들이 드나든 흔적을 오직 ‘아이들이 읽으면 안 되는 책’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러나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공간이었냐 아니냐가 아니라 아이들의 공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점이다. 

2) 1978.5.28 동아일보
3) 
1962.10.8 동아일보
4) 
1969.1.28 동아일보
5) 1976.4.30 경향신문
6)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하> 1998 
7) 
손상익 앞의 책


그들은 왜 만화를 비판했을까?
 
1900년대 초 잡지와 신문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만화는 본격적으로 언론이 출현한 1920년대에 이르러 기틀을 다진다. 초기 만화는 언론의 일부로 시사만평과 일종의 4컷 만화로 자리 잡아 이후 잡지와 단행본으로 확대된다. 초기 만화는 당연히 성인을 대상으로 했다. 하다못해 “멍텅구리”와 “허풍선이” 같은 당대의 인기 코믹 만화들도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30년대부터 어린이 만화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해방 직후와 6.25 전쟁을 전후하여 어린이 만화는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만화는 이때부터 비판의 표적이 된다. 
 
1926년 개벽 2월호는 당대 인기 만화였던 멍텅구리를 “민중에게 하등의 유익을 주지는 못한다”고 비판한다.8) 이는 조선일보의 상업주의적 편집방향 전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으나 당대의 만화 전반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였다. 

1940년대 들어 만화는 이제 어린이 문제가 결부되기 시작한다. 1948년 7월 5일 잡지 “백민”에서 양미림은 “만화를 문제시할 때 거기에는 ‘어린이’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데 “허무맹랑한 것과 미신적 내지 비과학적인 내용”과 “졸렬한 그림과 색채”, “제멋대로의 사투리와 한글 철자법 사용”을 들어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만화를 비판한다.9) 이후 논쟁이 벌어지고 유명 문인들이 합류하면서 문학인들 나아가 지식인 전반이 만화를 비판하는 형국에 도달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저 비판이 “만화는 어린이들이 보는 것”이고 “교육과 (순화된) 정서 함양을 위해 기능”해야 한다는 현재도 존재하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은 1961년 쿠데타에 성공한 후 도박과 폭력과 더불어 만화를 ‘사회 6대 악’으로 선정하고 만화를 검열 통제하였던 군사정부와 거리에서 만화 화형식이라는 기상천외한 행사를 했던 관변단체들과 ‘에듀테인먼트’ 즉, 공부에 도움이 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자는 현재의 산업논리와도 공유된다. 
 
그런데 문인들, 그리고 지식인들은 왜 이토록 만화를 비판한 것일까? 당시 만화 비판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문인들 중에서도 아동 문학가였고, 만화가 갑작스러울 정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견제일 수도 있다. 실제로 70년대 원로 만화가 박기준은 색동회 회장 김수남씨로부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며 아동문학가와 만화가가 글과 그림을 나눠서 작업하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증언하기도 한다.10) 그러나 이런 현상은 만화와 문학만이 아니라 방송 드라마와 영화 사이에서도 흔하게 벌어진 일이다. 한발 더 나가 활자언어로 무장한 지식인 집단이 이미지와 상상력의 매체인 만화에 대해 갖는 차이와 배제의 논리로 이해할 수도 있다.11) 그러나 만화 통제와 비판이 그토록 강력한 정당성을 갖고, 지식인과 군사정권에 공유될 수 있었떤 것에는 좀 더 주요한 측면이 있다. 

8)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상> 1996
9) 손상익 <한국만화 통사 하> 1998 
10) 박기준은 그 일을 계기로 양 집단간의 관계가 호전되었다고 한다. 
박기준 <한국만화야사> 디지털규장작매거진
11) 
김종현, <1980년대 한국대중만화의 상상력>, 2010 


<김혜린의 '비천무'>


이덕무는 왜 언문 소설을 비판했을까?
 
근대 이후 어린이는 국민 형성의 핵심 자원으로 보호와 교육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언론은 보호의 범주를 ‘(소년)범죄’라는 이미지로 집약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범죄만이 아니라 어떤 가치, 심성, 지식, 윤리관 일체로부터의 보호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폭력의 경험과 사례가 강력하다. 그런데도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삼국지’ 조차 한동안 그리지 못했던 것은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과정과도 관련된 문제일 수 있다.
 
훈육과 교육은 당대의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근대적 인간형을 기준한 것일테다. 따라서 허구와 실재, 윤리와 비윤리을 가르는 것은 민족과 국가, 국민으로 규정되는 가치에 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린이들의 ‘공부’는 근대 국가에서 국민을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경로일뿐 아니라 ‘서구’와 ‘근대’, ‘발전’을 욕망하고 동원되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재미를 명목으로 상상하고, 근대적 규율로부터의 일탈을 암시할 뿐 아니라 ‘놀게 만드는’ 만화란 모두에게 지탄 받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만화만이 아니라 방송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대중적 오락 전반에도 적용되는 것이기도 했다. 
 
18세기 조선시대부터 세책, 즉 책을 빌려주는 일이 성행했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이런 현실을 개탄한다. 18세기 학자 이덕무는 “언문으로 쓰여진 괴기한 이야기들을...(중략)...부녀자들이...(중략)...돈을 주고 책을 빌려보는” 것을 비판하고, 19세기의 이능화는 이런 “패설류의 책” 목록에 심청전, 구운몽, 홍길동전, 흥부전, 삼국지 등을 올려놓는다.12) 이는 근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 지식인들은 기존의 신소설과 대체할 근대적인 대중소설에 대한 배제의 논리 속에 순수문학을 구성할뿐 아니라, 민중들에게 근대적 소양을 “계몽”한다는 맥락으로 대중소설을 집필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며 근대 소설, 그리고 대중소설이 형성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논점은 근대 지식인들이 대중소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 배제의 논리 속에 순수문학 즉, 문단을 구축하였으며 대중문학을 계몽의 관점에서 평가했다는 점이다.13)
 
반면 만화는 상대적으로 대중문화로서의 논리가 강력하고도 노골적으로 작동하던 영역이었다. 만화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었고, 어린이라는 새로운 독자의 편입을 통해 상업적 성공을 이루었다. 그런데 어린이는 계몽 되어야할 국민 중 하나 일뿐 아니라 최후의 희망이기도 했다. 시사만화와 만평은 언론이라는 또 다른 지식인 집단 내부에 있었기에 비록 차별적 위계에 놓여있었을지라도 비판의 화살을 벗어날 수 있었으나 아동을 대상으로 한 만화는 그럴 수 없었다. 이러한 논리는 지식집단 외부에서도 받아들여져 6.25 전쟁 당시 유명 문인들이 전선을 방문하여 귀빈으로 대접받을 때 만화가들은 그 대중성을 인정한 남과 북의 군대에 의해 선전물과 책자들을 만들어내는 일에 투입되지만, 결코 문인들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14) 

12) 손상익 앞의 책
13) 이주라 <1910~1920년대 대중문학론의 전개와 대중소설의 형성> 2010
14) 
손상익 앞의 책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왜 화가 났을까?
 
만화는 여타 문화 영역에 비해 그 토대와 지위가 매우 취약했다. 문단이라는 전체 사회의 지식인-엘리트에 수렴되는 주체들에 의해 유지된 문학과 달리 만화는 지식인-엘리트 집단으로부터도, (순수/고급) 예술로부터도 배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화가 여타 문화영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량, 대중문화로서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화는 대중문화의 근간을 형성할 산업적 토대가 매우 취약하였다. 신문과 잡지 연재만화는 대중적 파급력에도 불구하고 주류 언론과 지식의 영역에 수렴되었으며, 50년대 말 이후 만화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단행본 시장은 대중들의 수용과 소비에도 불구하고 산업적 시스템을 갖추는데 실패한다. 
 
1961년 군사혁명 후 만화 출판이 사실상 중지된 상태에서 당시 만화가들의 단체 간부였던 이재화씨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찾아간다. "백과장은 수북히 쌓인 만화책 가운데 한권을 집어던지며 '보라'고 외쳤다. 만화 제목은 <지옥과 천당>이었고 내용은 우주전쟁에 관한 것으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타고 스탈린의 부하가 되어 활약한다는 것이었다."15) 이후 만화가 단체는 해체되고, 만화는 사전심의 제도를 통한 강력한 검열과 통제의 대상이 된다. 사회 6대 악의 하나가 된 만화는 공식적으로 대중문화 안에서도 가장 낮은 지위에 고정된다. 이제 만화는 허용된 좁은 틈에서만 대중들을 만나게 만든다. 
 
또 한가지 언급할 것은 합동에 의한 독점체제다. 1967년 출현한 제작, 유통, 판매 기업인 합동은 강력한 독점체제를 형성한다. 작품 내용만이 아니라 작가들의 작품의 편수와 고료까지 일방적으로 결정한 합동은 창작을 통제하고, 강제 판매 시스템을 도입하여 만화의 독자인 ‘대중’까지 배제한다. 이런 독점체제는 군사정부에 의해 묵인되었고, 합동에 저항하는 군소출판사들은 세무조사와 각종 탄압에 시달리고 합동의 공세에 번번이 무너졌다. 71년 한국일보가 만화출판 시장에 뛰어들며 독점체제가 무너지나 했으나, 결국은 자본 간의 타협으로 독과점 체제는 더욱 공고화된다. 합동-국민의 독점체제는 82년까지 이어진다.
 
국가와 자본 양쪽에 의한 통제와 압력, 그리고 지식인-엘리트 집단으로부터의 배제는 결과적으로 대량, 대중문화로서의 만화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잠식했으며, 문화 영역간의 서열에서 가장 낮은 위치를 배정받는다. 그래서 만화는 비평의 대상도, 학문적 연구의 대상도 될 수 없었다. 대중문화 일반의 현상이기도 한 이 상황은 70년대 고우영, 박수돌 같은 성인만화의 성장, 80년대의 뛰어난 작품과 작가들, 그리고 결국 공식적으로 ‘성인들도 소비하는 대중문화’로 인정받게 된 이후에도 문화영역 내부에서의 지위는 변하지 않은 채 90년대를 맞이한다. 

15) [손상익 앞의 책]


문화산업과 애니메이션의 쓸쓸한 조우

1967년 <홍길동> 개봉으로 대중문화로서의 가능성을 확인 했던 애니메이션은 이후 해외 작품이 대거 수입되면서 무력화된다. 78년 <로보트 태권V>가 SF애니메이션 붐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은 오랫동안 침체기에 빠진다.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제작은 수입으로 대체되고, 제작자들은 하청으로 돌아선다. 애니메이션, 정확히 “만화영화”에 대한 인식은 만화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극)영화 감독들이 나서서 교육적 효과를 강조하고, 언론은 권선징악이라는 최소 기준선을 통과했다고 승인하면서도 “주제 면에서 황당무계하거나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전개시킴으로서 어린이들의 단순한 호기심 흥미 따위만 불러일으”킨다고 비판한다.16) 제작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하청과 외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모방과 흥행작의 자기 모방만을 반복하며 90년대를 맞이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물결 위에서 상업적 수익과 상징 가치라는 수렴점을 통해 산업화되던 여타 문화산업과 달리 애니메이션은 산업화에 실패한다. 막대한 지원과 자본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은 상품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능력도 없었고, 대중문화로서의 지반도 빈약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돈과 기회, 국민적 관심과 애정을 까먹은 애니메이션은 점점 사양화되어가는 하청과 국가를 통해 유입된 자원을 중심으로 버텨나갈 수밖에 없었다. 몇몇 작품과 감독, 제작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과를 보이기도 했지만, 단일 상품으로 한순간에 공인된 대중문화로 상승하려는 시도는 무산되고, 편입은 끝없이 잠재적인 후보군의 하나로 유예되었다. 

16) [1979.7.5. 동아] 


<"돼지의 왕", 연출 연상호>


2011년의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자원

최근 한국의 애니메이션계가 수립한 유니버셜과 아동 혹은 가족, 국제합작이라는 공식은 이런 실패와 <뽀로로>의 사례, 그리고 그나마 제작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방송 애니메이션의 경험 속에서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전략은 문화산업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이 취할 수 있는 여러 전략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더더군다나 한국 애니메이션이 대중문화/예술로서의 자기 가치와 기반, 특히 여타 대중문화영역과의 경쟁과 비교 속에서 차지한 지위가 갖는 현재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안전하지만, 지나치게 소극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2011년의 세 편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다른 전략을 구사했다. 1억 2천만원의 제작비로 <돼지의 왕>을 제작한 연상호 감독의 이야기는 이렇다. 

“소년 만화 시장이 죽으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 있는 원작이 많이 없어졌어요. 오리지널은 기획도 힘들지만, 기획을 (투자와 지원의 검증시스템을) 통과시키기도 힘들고...(중략)... 반면, 지금 만화 시장은 성인만화에요. 강풀도 그렇고, 윤태호도 그렇고. 이런 상황에서 애니메이션도 성인물이 되어야 하고, 영화적인 느낌의 성인물에 적응하지 못하면 산업 자체가 힘들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죠.”17)

그러니까 연상호 감독은 아동용 시장이라는 이미 존재하는 안전한 시장 말고, 영화와 방송의 관객과 웹툰을 통해 그 존재를 잠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교집함으로서의 성인 관객에 주목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영화라는 자원에 착목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돼지의 왕> 만이 아니라 <소중한 날의 꿈>과 <마당을 나온 암탉>은 기존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극)영화 인력과 업체가 결합하고, 영화 제작 배급 투자 시스템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으며, 영화의 스타일과 문법을 차용되었다. <돼지의 왕>과 <소중한 날의 꿈>의 비평적 성공은 사실 주류 영화계에 평가며, <돼지의 왕>은 아예 영화계에 의해 발견되었다. 물론 애니메이션 특히,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이 영화로 수렴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도 하겠으나, 한국 애니메이션계가 처한 현재의 상황 속에서 바라본다면 이 작품들이 ‘살아남기’ 위해 일정한 지위와 자원을 확보하고 있는 영화라는 문화 영역에 기댄 것이 성공의 한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17)  2011년 11월 5일. 인터뷰 이상욱


남겨진 이야기

한국 애니메이션과 만화는 ‘교육과 정서 함양’ 그리고 ‘산업’의 논리만이 살아있다. 문제는 ‘아동용’ 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 있는 서열과 배제, 통제의 논리다. 애니메이션계는 대중문화가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18) 국가는 오랫동안 자본과 결합하여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통제하고, 산업이라는 맥락에서도 제한된 진흥 정책만을 펴왔다. 사실 국가가 할 일은 60년대 만화가들이 합동이라는 독점 기업으로부터 구출해달라고 하던 그 순간에 있었다. 또한 애니메이션 초창기에 ‘외국 애니메이션 수입을 막거나, 제한해달라’고 하던 그 순간에 있었다. 이런 문제는 여전하다. FTA로 인한 시장 개방의 문제를 어찌할 것인가? 정부 자신이 양산해낸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작권 문제는 다운로드 족들만의 것인가? 독과점 포털의 무료화 정책에 대해 정부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예술인들과 노동자들의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사실, 국가가 할 일은 과거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답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때때로 공백과 균열은 현재를 드러내기도 한다. 일본도 검열 문제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표적이 된 작가 “나가이 고”는 압력에 맞서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명랑 학원물에 불과했던 작품을 초등학생들이 총을 들고 전쟁을 벌이고, 나중에는 부모들까지 살해하고는 그 시체를 들고 낄낄되는 무시무시한 작품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19) 그러니까 공백과 균열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라리, 괴물이다. 

18) 예를 들어, 예술영화는 대중영화라는 기반 위에서 상징적 가치를 구성해나간다. 권혜원, <예술영화와 대중영화에 대한 인지적 경계 인식 비교> 2010
19) 
최샛별 외, <만화! 문화사회학적 읽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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