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

적자생존?


적자생존. 생물학의 혁명, 다윈이즘의 앙상한 골격. 그 뼈대를 부여잡고 적자생존을 외치고, 승자독식을 정당화하며, 자본의 독점과 권력의 영속을 당연하다 주장한다.

인류의 역사를 보라. 인류는 자연 선택의 논리대로라면 도태되었어야할 약자들, 제거되었어야할 개체들을 자연계의 차가운 선택의 세계로 내치지 않았기에 달라질 수 있었다. 그렇게 가족을 이루고, 친족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듬으로서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인류가 지배적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적자생존의 룰을 거슬렀기 때문이었다.

좌우를 구분하지 않고 복지가 화두가 된 오늘날. 그러니까 유념할 것은 이 점이다. 약자들이 불쌍해서 돕자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받고 인간으로서의 권리,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을 누릴 수 있는 사회라야 건강할 수 있으며, 그런 사회라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독립영화가 불쌍하니 도와달리가 아니다. 사회의 구석을 살피고, 예술과 창조의 이름으로 구현할 그 다양성들이 존재할때에야 우리 사회가, 우리 영화가 더 건강해지고, 더 풍부해지고, 더 창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진화의 근본은 변이다. 그리고 변이는 우연이며 확률이다. 더 많은 변이가 더 많은 선택 가능성을 낳고, 더 많은 적응 기제를 발현시킨다. 적응의 결과가 아니라, 적응을 낳은 그 조건을 볼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색의 적자생존 논리가 아니라 풍부한 다양성과 잠재적인 가능성, 끊임없는 실험과 시도, 도전이 보장될 수 있는 사회적 관용과 보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