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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한국 사회와 노동자 파업, 첫번째

* 이 원고는 "쌍용 파업 그 후"의 세번째 기획입니다.
* 각기 다른 필자에 의해 10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세부 계획은 매체 참조)
* 원고는 매체 편집 전입니다. (레디앙,참세상,울산노동뉴스,미디어충청,금속미디어에 개재됩니다)


한국 사회와 노동자 파업, 첫번째


1. 저주

2009년, 쌍용 파업 당시. 평택 공장 정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정문 왼편은  파업 노동자 가족들의 자리였다. 그들은 온갖 욕설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오른편은 경찰들의 자리. 그 오른편에 때때로 회사측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했다. 삼삼오오, 공장을 바라보며. 그 곳에 그녀가 있었다. 예순과 일흔 사이를 오갈 듯한 나이.

7월 말, 처음 나타난 그녀는 처음엔 왼편 파업 노동자 가족들 뒤에서 머뭇거렸고, 다음 날엔 오른편에 있었다. 그리고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누구도 자신을 제지 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후엔 크게, 더 크게, 더 크게, 그러나 침착하게, 천천히.

펑~ 터져라~ 다~ 타죽어라~ 펑~ 터져라~ 다~ 타죽어라~

무엇이 그녀에게 불구대천의 원수에게나 쏟을법한 저주의 말을 파업 노동자에게 내뱉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인간이 인간을 그토록 증오하게 만들 수 있는 걸까?

2. 나쁜 파업

파업은 나쁜 것이다. 불편하고 짜증나고 가끔은 흉물스럽다. 귀족 노조의 임금 올리기 파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시민을 볼모로한 공공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강성 노조의 불법 정치 파업이라면 더 나쁘다.

경제위기, 나라 경제가 휘청거리는데 저들은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 비정규직과 저임금 노동자들, 말이 사장님이지 비정규직과 다를 바 없는 영세자영업자들, 88만원 세대가 삶의 바닥을 헤매고 있는 마당에. 모두가 어려운 대한민국에서 저들의 파업은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따라서 저들만의 것이고, 따라서 나쁘다.

3. 파업은 어디에 있나?

그래서 우리 사회의 주류들은 대기업 귀족 노조의 파업을, 공공 기업 노조의 파업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온갖 데이터와 언설이 등장한다. “이 가뭄에 왠 파업?”이라는 외국인들이라면 죽었다 깨도 이해 못할 논리도 등장한다. 그러나 귀족 노조와 공공기업 노조를 “배부른 자들의 이기심”으로 몰아붙이던 그네들은 최저임금 받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얼마나 배고팠겠냐”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는 정부와 한나라당도 인정하는 비정규직법 문제 때문에 발생한 파업을 “법의 문제”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개별 기업들의 파업은 비난과 함께 공권력의 응징이 뒤따른다. 헌법은 단결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에는 세계 유일의 업무방해라는 무수불위의 칼이 있다. 헌법상의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하위법인 집시법으로 무력화시키듯, 하위법인 업무방해로 감옥에 처넣고, 수백억씩 손해배상 때리면 알아서 기게 되어있다. 특히, 법 외 존재인 비정규직, 파견 노동자, 도급 노동자 따위 한 칼이다.

강성노조의 정치 파업에는 더욱 용서 없다. 정치에 관여하려는 불순한 의도에 색깔 공세가 쏟아지고, 산업손실에 대한 우려와  파업 공화국 대한민국에 대한 개탄이 흘러넘친다. 그렇게 한참을 질타와 우려를 쏟아낸 며칠 뒤, 어김없이 덧붙인다. “이번 총파업에도 참여한 노동조합은 소수에 불과하다. 영향력은 미미하다.” 덕분인지, 1997년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가 불러일으킨 총파업 이후 그들이 우려해 마지않는 강성 노조의 불법적인 정치 총파업은 이제는 구경조차 힘들다.

이제 우리가 보는 것은 최저임금 보다 10원 많은 임금을 받고 집단 해고되어 6년째 싸우고 있는 기륭 전자 노동자들의 파업, 이제는 한나라당도 인정하는 기간제법 때문에 해고될 위기에 처하자 매장을 점거한 이랜드 아줌마 노동자들의 파업, 정부가 외국 자본에 도매금에 회사를 팔아버리고 판매 대금도 받지 못하다가 문제가 생기자 10년~20년 소처럼 일하다 잘린 쌍용 노동자이 살려달라고 벌인 파업 따위다.

4. 노동조합은 어디에 있나?

노동조합으로선 환장할 노릇이다. 파업만 했다하면 욕먹고, 그나마 그 파업조차 날로 어렵다. 정리해고법과 파견법, 기간제법, 노동조합법 등 온갖 노동법 개악이 10년 동안 차근차근 진행되더니 결국 타임오프제 시행을 목전에 두고 있다. 노동조합은 이제 붕괴 직전이다.

그러나 살펴보면 다른 이면이 있다. 한국은 심각할 정도로 노동시장이 유연화되어 있다.  노동자들은 대기업과 중소영세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정규직은 다시 직고용 기간제, 파견, 도급, 용역 등의 간접고용 등으로 촘촘히 나뉘어져 있다. 도저히 하나의 입장으로 통일된 목소리를 낼 수 없으리만치. 그래서 노동자들은 정부와 재계, 개별 기업 대신 자신들끼리 적대한다.

문제는 이것만 아니다. 한국의 법과 제도는 노동조합, 노동운동이 “노동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노동조합의 노동시장 개입 여지가 가장 낮은 것이 바로 한국이다. 노조 조직률도 꼴찌다. 게다가 한국은 전 세계에서 오직 미국, 일본, 한국 3개국만 갖고 있는 “기업별 노조 체계”라는 희한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법과 제도, 관습, 결론적으로 사회적 시스템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개별 기업의 문제, 즉 자기 기업의 임금과 노동조건”만 문제 삼을 수 있다.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은 노동시장에도, 노동 정책에도, 하다못해 고용 정책에도 개입하지 못한다. 개별 기업의 문제를 낳는 거시적 문제지만 거기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오직, 거시적 문제가 개별 기업 수준에서 발현되어서야 개입할 수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사회적 시스템에 따르면 노조는 “자기 사업장의 문제 즉, 임금과 노동조건”에만 개입할 수 있다. 그 시스템에 따라 자기 사업장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파업을 하면, 물론 “이기적인 일”이다. 개별 사업장의 문제를 넘어선 사회적 문제에 개입하려는 순간, 불법이 된다. 노동조합 간부는 “빨갱이”가 된다. 이런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노총은 개별 기업을 넘어선 “산별노조” 건설에 목을 매고 있지만, 사회적 시스템이란 만만한 게 아니다. 시스템은  악순환을 낳고, 87년 이후에야 간신히 하나의 사회적 실체로 등장한 노동조합은 날로 고립되어간다.

그 사이, 정규직 0명의 공장 동희오토 노동자들은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 두드려 맞고, 쌍용 자동차 파업 이후 파업 노동자들은 수입억의 손배소와 고소고발에 고통 받는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5. 한국의 노동자, 그들은 누구인가?

정부는 지난 4월 취업자 수가 40만을 넘었다고 자화자찬했다. 경제성장률은 7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단다. 성장률과 실업자 감소. 분명 삶이 나아져야 한다. 그런가?

국민총생산(GDP)에 기반한 경제성장률. 그러나 GDP는 총량일뿐 분배도, 복지도, 인권도, 행복도 보여주지 않는다. 오죽하면 1968년에 미국 대선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GDP는 우리 자녀의 건강, 교육의 질, 그들이 놀이로부터 얻는 즐거움 등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했겠나?

2008년 기준으로 한국의 자영업자는 597만 명. 근로 인구 중에서 무려 30%를 넘어선다. OECD 평균 13.8%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2007년 기준, 월 150만원 미만의 영세자영업자가 무려 40.1%다. 2007년 당시 자영업자가 604만 명. 중위임금 2/3 이하의 소득을 얻는 저소득층이 최소 242만 명이란 얘기다. 게다가 여기에 145만 명에 이르는 무급 가족 종사자도 있다. 여기에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정부와 기업은 임금을 죄고, 내수는 위축되고, 다시 자영업자는 망해간다.

정부가 신규 취업자가 40만을 넘었다고 한 것은 4월. 자영업자 수는 2007년 604만, 2008년 597만, 2009년 571만, 2010년 1월엔 548만으로까지 줄었다. 5월에는 더 줄었을 것이다. 사라진 자영업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또 하나. 정부 발표의 40만 중 25만은 정부재정에 의한 고용효과였고, 태반은 인턴 등 불안한 저임금 일자리였다.

임금 노동자들은 어떤가? 2009년 기준으로 1,648명의 근로인구 중 51.9%인 855만명이 비정규직이다. 정규직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평균 임금의 2/3 이하의 소득을 얻는 저소득층이 무려 430만 명이다. 그 중 최저임금도 못 받는 사람만 175만 명. 최저임금도 중위 임금의 30%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이 그토록 따라가고 싶은 OECD 기준은 44%다. 이런대도 여전히 연간 노동시간은 2,357시간으로 최고다. OECD 평균은 1,777시간이다. 하루 8시간, 72일을 더 일하고 간신히 생존 ‘만’ 가능한 소득으로 연명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자영업자와 임금 노동자를 합쳐 죽어라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무려 700만에 육박한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그들의 가족까지 환산하면 끔찍해지기 시작한다. 국민소득에서 노동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0년 54.9%에서 2006년 51.6%로 감소했고, 공공지출은 GDP의 5.7%로 OECD 평균 20.7%의 1/3에 불과한 사회,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지는 사회에서 700만 혹은 그들의 가족들이 얼마 안되는 밑천으로 서로가 서로를 파먹으며 산다는 소리다. 자리를 바꿔가면서.

6. 정치에서 배제되는 사람들

우리 사회에서 정치는 “국가와 정부, 정치가”들의 것이다. 시민이, 국민이, 자영업자가, 지역주민이, 농민이, 빈민이, 노동자가 개별적 개인을 넘어선 집단적 주체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중이 스스로를 조직하여, 자기 개별의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불온하고, 부당하며, 불법적인 것이다.

그렇게 권력은 노동자를 정치의 장에서 내쫓는다. 노동조합, 이른바 조직된 노동에게는 기업이라는 울타리를 족쇄로 만든다. 그리하여 조직된 노동는 사회적 차원에서 자신의 이해관계가 달린 문제에서 배제되고, 권력은 쌍용 자동차에서처럼 그 사회적 차원의 문제가 개별 기업에 내려 꽂일 때에야 간신히 버둥거릴 자유를 선심 쓰듯 내민다. 언제나 그렇듯 때는 이미 늦었다.

조직되지 않은 노동, 조직되지 않은 피억압 대중은 더 철저하게 정치의 장에서 배제 당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노동조합은 몸부림이라도 쳐볼 수 있다. 영세자영업자와 저임금 노동자를 합친 700만이, 다른 면에선 비정규직 855만이, 숫자로 환산 불가능한 약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지도, 자신들을 대변하는 자들을 찾지도 못한 채 거기 서 있다.

남는 것은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라는 게임이다. 맘에 안 들면 안 찍으면 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선거란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게임이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자기 삶을 돌보는 것 이상의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몇 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선거를 목을 빼고 기다리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삶도 세상도 복잡한 것이니까. 게다가 돈도, 권력도 없고, 조직 되지도 않은 이들을 대변할 정치 세력을 찾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다.

노동자 파업이 발생할 때마다 “대화와 타협”을 요구한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이란 대등하거나, 최소한 대화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면 심대한 불이익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사회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대상에게 대화와 타협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저 항복하라는 뜻일 뿐이다.

이런 우리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다. 시키는 대로 하던가, 아니면 이판사판 몸부림이라도 치던가. 용산의 철거민에겐 그랬듯이, 쌍용 노동자들이 그랬듯이. 그렇게 대화와 타협은커녕, 뭔가를 해볼 최소한의 기회마저 원천 봉쇄된 채 순응과 몸부림이라는 양 극단을 오가고 있는 거다.

7. 대중의 정치, 노동의 정치

정치를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의 독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조직하여, 스스로 대항해야 한다. 여성과 장애인, 성적 소수자의 사례가 그것을 보여준다. 요즘은 당연한 지하철 엘리베이터. 그거 장애인들이 정말로 박터지게 싸워서 얻은 것이다. 하기에 노동자 파업은 단순히 그들만의 것 이상이며, 이상이어야 한다.

자신들을 배제된 정치의 장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노동은 저항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한다. 태어난지 20년 밖에 안 된 한국 노동운동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 유지되는 견고한 시스템을 바꾸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87년 이후 시민운동은 선별적이나마 사회적 주체로 인정받고 체제 안으로 수렴된 반면, 노동운동은 언제나 탄압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던 노동운동이 기업별 노조 시스템에 안주하며, 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킬 기회마저 잃어버린 것은 명백하다. 노동조합, 특히 여전히 힘을 가진 대기업 노동조합들이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않는 한 미래는 없을 것이다. 극악한 원하청 구조 속에 중소영세 기업의 피를 빨아 부를 쌓고 있는 대기업의 울타리 안에서 제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안주하는 한 한국의 노동운동이 맞이하게 될 맞이하게 될 미래란 대우 버스 혹은 쌍용이다. 비정규직을 안전판 삼았다가 정규직까지 날아가 버린 대우 버스. 그리고 기업이라는 울타리에서 한 순간에 밀려나 저소득 불안정 임금노동자로 전락하는 쌍용 자동차.

시민운동 역시 노동과 함께 해야 한다. 시민과 노동의 경계가 국가와 자본이라는 권력과의 경계만큼 넓은 것일까? 게다가 임금노동이라는 관계와 정체성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조직된 노동 뒤에 누구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마당에.

진보정당도 마찬가지다. 노동자 서민을 위한 정당이란 것은 현실적으로는 노동자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정치는 중차대한 과제다. 그런데 노동의 정치는 민주노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민주노총의 한계를 명분으로 조직 노동과 거리를 두면서도 조직되지 않은, 배제된 절대다수의 노동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라면 이건 더 큰 문제다. 사실 민주당이 선택된 것은 한나라당이 워낙 밉상스럽기 때문이거나, 그래도 민주당이 되면 숨 좀 트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저임금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나라당이던, 민주당이던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들을 배제한 채 이뤄진 연합이란 결국 정치의 장에 관여할 수 있는 사람들 만의 게임으로 전락되는 것은 아닐까?

노동운동이던, 시민운동이던, 진보정당이던 숫자조차 파악되지 않는 “조직되지 않은, 배제된 , 타자화 된 그들”을 수렴하지 못하는 한 게임은 그저 그들만의 게임일 것이다. 우리는 또 몇 년 후, 몇 십 년 후 변한 것은 없다고 한숨을 쉬게 되지 않을까?

한국사회와 노동자파업의 문제는 노동자의 저항의 권리로서의 파업권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유보되고 배제되는 노동정치의 문제다. 노동의 정치가 당연해지는, 노동이 사회적 주체로 자리 잡지 않는 한 파업은 더 극단적인 양상으로 계속될 수 밖에 없다. 동시에 한국 사회의 노동자 파업에 얽힌 문제는 파업조차 할 수 없는, 노동-사회-진보에서 조차 수렴되지 못한 채 “배제된 그들”을 드러내는 화두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