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글, "심상정이 떠났다"에서 "이제 각자의 패를 꺼낼 때가 되었다"고 썼습니다.
* 그래서 나의 패를 꺼내봅니다.
* 진보매체에 기고를 요청했으나, 실어줄지는 모르겠습니다.
(레디앙과 참세상이 실어주었습니다) (울산노동뉴스도 실어주었습니다. ㄷㄷ)
* 만약 매체에 실린다면 내용이 아주 조금 다를 겁니다.
* 글이 길어 1,2편으로 나눕니다.
Agian 2002는 가능한가?
그러나 나는 이러한 문제를 심상정이나 진보신당 내의 통합에 가까운 연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대중 운동과 대중 정치의 영역을 공백으로 두고, 어쩌면 이를 영속화 시킬 수도 있는 제 3당 혹은 사실상 통합 프로그램을 내장한 연합을 주장하는가?
나는 이 문제를 민주노동의 이례적인 성공 경험에서 찾고 싶다.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합법) 진보정당 운동은 매번 실패했다. 우리 사회 운동 진영의 다수는 매 선거 때마다 비판적 지지를 선택해왔다. 그러나 단 한번, 2000년 민주노총의 독자 진보정당 건설이 시작되던 시점에서 그 다수 세력이 독자 정치세력화의 길에 합류했다. 그 “좌우 동거”라는 주체적 조건이 사회적 정세와 맞물려 2002년부터 시작된 민주노동당의 성공을 가져왔다.
나는 심상정과 진보신당 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의 배경에는 이 성공의 경험이 있다고 판단한다. Again 2002.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통해서든. 좀 더 큰 사이즈로 국민참여당과 창조한국당까지 포괄한 것이던 간에. 좌우 동거를 통한 의미 있는 정당의 건설함으로서 집권을 향해 달려가자는 것.
왜냐하면 독자적 진보정당의 실패를 확인했으니까. 민족주주의자들을 제외한 진보정당의 토대가 얼마나 취약한지 확인했으니까. 진보정당이 대변하고자 하는 계급과 계층은 여전히 ‘정치’ 밖에 있으니까. ‘정치화’된 주체는 시민이니까. 따라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한, 진보정당의 집권은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진보정당의 생존과 성장을 보증해줄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의 성장이 당장은 불가능하니까. 혹은 정치운동 스스로는 그 공백을 채울 수 없으니까.
진보신당은 무엇에 반정립 했나?
심상정은 진보신당을 가리켜 ‘반’민주노동당으로 정립한 정당이라 불렀다. 그러나 심상정은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에만 반정립 하는 것이 아니다. 창당 초기 진보신당 내부에서 제출된 각종 공식 비공식 발언들을 살펴보면, 진보신당이 실은 “반운동권, 반데모, 반북, 반민주노총, 반노동자주의, 반정파” 정당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동권과 데모, 정파, 민주노총 그리고 민주노동당으로 상징되는 87년 체제의 극복. 이름 하여 진보의 재구성. 그러나 내용 없는, 실패한 재구성. 결론적으로 반정립.
이른바 진보의 재구성은 정당의 운영원리나 정책 수준의 변화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87년 체제란 87년 이후 형성된 사회시스템 안에 있는 것이며, 87년 이후의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다양한 사회운동 등을 포함한 총체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사회적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한 경로로 ‘선거’ 이외에는 사고할 수 없었으며,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문제의식에 동의하지 않거나 노선적, 정서적 차이가 있는 제 운동 주체들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절연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낡은 운동과 절연했으며, 스스로도 변화시키지 못했으면서도 이른바 운동권과도 절연했다. 그 결과는 낡은 운동으로부터‘도’ 고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진보신당은 무엇을 했나?
많은 진보신당 당원들이 민주노총의 한계를 비판한다. 그러나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진보신당이 그토록 목 놓아 외쳤던 비정규직 문제를 가장 책임 있게 대응한 것은 실은 민주노총이었다. 1%를 간신히 넘는 비정규직 노조 조직률. 이랜드와 같은 상당하게 정치화된 영역을 제외하면, 우리 사회 다수의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한 것은 그토록 비판받는 민주노총이지 진보신당이 아니다. 최소한 우리 사회에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한 비정규 운동의 주체들은 비정규직 노동조합원들이었다. 반면, 작년까지 중앙당 비정규 담당자였던 나를 포함하여 진보신당이 한 것은 지난 전국위원회에서의 발언처럼 “비정규 연대기금 1억으로 플랭카드 만들자”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치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발언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끊임없이 주장한 것처럼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이며, 운동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의 과제는 그 대중운동과의 결합 속에서 나와야할 것이다.
노동조합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주장 역시 있어왔다. 맞다. 노동조합이 모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진보신당은 일상의 영역, 이른바 생활의 영역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를 “시혜와 동정”의 수준에서 발언하는 것 이외에 도대체 무엇을 했나? 계급 정치가 배제된 상황에서 진보정당이 걸을 수 있는 길은 탈계급적 공간에 탈계급적 방식으로 개입하거나, 아니면 탈계급적 공간에서 계급적 정치를 구성하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럴 때 진보정당이 취한 것은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탈계급적 전략이었던 것 아닌가?
민주노총과 관련하여 추가할 것은 이른바 “민주노총이 노동계급을 대표할 수 없다”는 논리다. 정말로 민주노총이 노동계급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표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설득하고, 비판하고, 견인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노총이 노동계급을 대변할 수 있는 진보정치를 구성하여, 민주노총이 스스로 그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10%에 불과한 조직률을 탓하는 것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프랑스 노총이 조직률이 높아서 2004년 최초 고용 투쟁의 주력부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른바 정치 운동이라면 기업별 노조체제에 갇혀 있는 노동조합을 사업장 밖으로 끌어내고, 나아가 기업별 노조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자기 과제로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무능하거나 무책임한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진보신당 왼편의 주장처럼 그저 ‘기름밥 먹는 것들이 못마땅한’ 중간계급의 정당에 불과하기 때문인가?
민주노총을 비롯한 당 밖의 대중운동 특히, 노동과의 문제만이 아니다. 진보신당은 당 내의 다양한 계급적 주체와 함께 하는데 무기력 했다. 예를 들어, 진보신당은 농민 당원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중소영세 당원들과는 무엇을 했을까?
진보신당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추가하고 싶은 것은 이를테면 노정태 같은 사람들의 주장이다. 신당원과 구당원. 촛불당원과 민노당 출신 당원의 차이. 그러나 이런 분석은 센세이셔널 하긴 해도 결코 현실을 드러내지도 현실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촛불 당원은 결코 하나가 아니며, 지난 1년 반의 과정 속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으며 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심상정의 선언 이후 벌어질 논쟁은 이러한 분화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당원과 신당원과 같은 과도하게 규정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촛불도, 시민도 하나가 아니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배타적 계급 정당” 즉, 노동계급만으로 구성된 정당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선거를 통한 사회변화를 부정하는 것 역시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고 긴 이야기를 한 것은 권력에 맞서 겨우 “시민”이라는 주체만이 서 있는 상황, 계급적 대중운동과 조직은 시민권조차 획득하지 못한 것은 물론, 대중정치 자체가 봉쇄되어 있는 상황, 이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다고 주장 하고 싶기 때문이다.
당연히 진보정당은 중간계급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현 시기, 이른바 촛불로 상징되는 “시민”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심상정을 비롯한 일부의 주장은 이 시민들을 인정하면서 실은 그들이 하나가 아님을, 하나가 아닐 수 있음을 묵과하고 있다. 정치적 지지가 계급적 지위와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선거와 제한된 시민사회 공간을 통해 구성되고 호명되는 이른바 국민과 시민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균열이 존재하며, 다양한 계급적, 계층적 분화가 존재한다. 그러나 체제는 이들을 체제 친화적이며 탈계급적이며, 최소한 중간 계급적 주체로 제한하려 한다. MBC 파업을 지지하는 주체는 용인해도, 제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주체는 용인하지 않는 이른바 ‘선택과 배제 전략’은 문민정부 이후 항상적으로 존재해온 전통적 전략이다.
필요한 것은 시민과 노동의 연합, 즉 계급 연합이다.
이런 상황에서 탈계급적 관점에서의 시민을 지지 기반으로 삼겠다는 것은 그 계급배제, 대중배제 정치를 영속화하는 것일 수 있다. 중간 계급의 지지를 얻는데 급급해 중간 계급의 변화와 분화를 포기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중간계급과 하층 계급의 연대와 단결, 연합을 포기하는 것”이다. 연합을 말하지만 실은 “중간 계급 간의 연합”으로 결국에는 “정치화된 그들에 국한된 연합”을 주장하는 것이다.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의 공백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없는 한 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경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촛불과 시민은 결코 고정불변한 계급이 아니며, 영원히 보수 양당 체제에 갇힌 주체도 아니다. 그들 내부에서도 정치적 지향과 계급적 지위에 있어 다양한 분화가 있고, 있을 것이다. 노동계급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계급과 연대하고 있고, 할 수 있는 주체다. 사회민주주의적 변화를 위해서라도 진보정당이 해야 할 일은 “시민과 노동의 연합”이다.
중요한 것은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
이제와 나는 반성한다. 나는 과거 민주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른바 자주대오와 당을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아는 정당운동의 개념에 입각할 때 너무도 상이한 노선을 가진 두 세력이 함께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합법정당 노선을 계량으로 폄하한 것을 반성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제와 민주노동당과 함께 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의 합법정당 노선이 옳았다고 평가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반성하는 것, 어쩌면 우리가 반성해야할 것은 정당운동을 계급적 대중운동, 대중 정치의 관점에서 보지 못했던 점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 운동의 수준에서 어떤 당이냐 ‘만’이 아니라,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를 뿌리내릴 것”이냐며, 이 과제를 성공하지 못하는 한 어떠한 방식의 진보정당 운동이라 해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나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을 준비하고 있는 진보신당 왼쪽의 정치세력의 시도가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조직 노선이 무엇이든 간에 다양한 정치운동의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그 과정을 통해 계급대중을 정치화 시키는 데 주요한 일익을 전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려 말하면 어쩌면 현 시기에 더 중요한 것은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에 대한 입장과 계획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진보신당의 제 2창당
진보신당은 2000년 민주노동당의 재창당 운동과 유사한 문제의식에 입각한 이른바 제 2창당 운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왜냐하면 2000년의 재창당 운동은 좌우 동거라는 커다란 그림이 깔려 있었으나 현재의 제 2창당은 오른쪽을 뺀 왼쪽끼리의 제 2 창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00년의 재창당은 한국사회의 제 운동진영이 독자정치세력화라는 큰 흐름에 함께 복무한다는 대의와 명분, 그리고 비전이 있었지만 2008년 진보신당의 제 2창당은 “변화해야한다”는 주장만 있었을 뿐 명분도 비전도 없었다.
나는 진보신당이 또 다시 제 2창당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 정치의 형성”을 위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정파적, 정치적, 노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의 과제와 지향이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제 2창당을 넘어 최소한의 연대와 연합을 위해서도 그렇다. 그렇지 않을 때 진보신당은 결국 심상정의 제안한 길로 가거나, 혹은 심상정의 길은 아니지만 그닥 다르지도 않을 길을 걸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과적으로는 말이다.
진보신당, 이제 그만 내려오라
(나는 전진 토론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따라서 토론 내용을 알지 못한다. 또한 사민모임 토론회의 경우 토론문이 공개되지 않아 별도의 입장을 제시하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전진의 지난 주 토론회에서 장석준은 ‘비’노동 전략을 제안했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노동자가 될 ‘비(be)'노동자, 노동에서조차 배제된 가사노동 등의 ’비(非)‘노동자를 위한 정치.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비’노동 전략에는 여전히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를 위해 진보정당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관점과 계획이 빠져있다고 본다. 나는 장석준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장석준이 그 공백을 채워달라고 하는 것이다. 현재의 사회구조 안에서 ‘비’노동 전략 역시 탈계급적 공간에서의 탈계급적 정치활동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에 대한 지향과 계획을 자기 과제로 위치 지울 때에만 ‘비’노동과 같은 의미 있는 전략은 성공하게 될 것이다.
긴 글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렇다.
진보신당이여. 이제 그만 허공에서 내려와 대지에 발을 딛자.
* 그래서 나의 패를 꺼내봅니다.
* 진보매체에 기고를 요청했으나, 실어줄지는 모르겠습니다.
(레디앙과 참세상이 실어주었습니다) (울산노동뉴스도 실어주었습니다. ㄷㄷ)
* 만약 매체에 실린다면 내용이 아주 조금 다를 겁니다.
* 글이 길어 1,2편으로 나눕니다.
진보신당, 이제 그만 내려오라 (2)
Agian 2002는 가능한가?
그러나 나는 이러한 문제를 심상정이나 진보신당 내의 통합에 가까운 연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대중 운동과 대중 정치의 영역을 공백으로 두고, 어쩌면 이를 영속화 시킬 수도 있는 제 3당 혹은 사실상 통합 프로그램을 내장한 연합을 주장하는가?
나는 이 문제를 민주노동의 이례적인 성공 경험에서 찾고 싶다.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합법) 진보정당 운동은 매번 실패했다. 우리 사회 운동 진영의 다수는 매 선거 때마다 비판적 지지를 선택해왔다. 그러나 단 한번, 2000년 민주노총의 독자 진보정당 건설이 시작되던 시점에서 그 다수 세력이 독자 정치세력화의 길에 합류했다. 그 “좌우 동거”라는 주체적 조건이 사회적 정세와 맞물려 2002년부터 시작된 민주노동당의 성공을 가져왔다.
나는 심상정과 진보신당 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의 배경에는 이 성공의 경험이 있다고 판단한다. Again 2002.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통해서든. 좀 더 큰 사이즈로 국민참여당과 창조한국당까지 포괄한 것이던 간에. 좌우 동거를 통한 의미 있는 정당의 건설함으로서 집권을 향해 달려가자는 것.
왜냐하면 독자적 진보정당의 실패를 확인했으니까. 민족주주의자들을 제외한 진보정당의 토대가 얼마나 취약한지 확인했으니까. 진보정당이 대변하고자 하는 계급과 계층은 여전히 ‘정치’ 밖에 있으니까. ‘정치화’된 주체는 시민이니까. 따라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한, 진보정당의 집권은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진보정당의 생존과 성장을 보증해줄 대중운동과 대중조직의 성장이 당장은 불가능하니까. 혹은 정치운동 스스로는 그 공백을 채울 수 없으니까.
진보신당은 무엇에 반정립 했나?
심상정은 진보신당을 가리켜 ‘반’민주노동당으로 정립한 정당이라 불렀다. 그러나 심상정은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에만 반정립 하는 것이 아니다. 창당 초기 진보신당 내부에서 제출된 각종 공식 비공식 발언들을 살펴보면, 진보신당이 실은 “반운동권, 반데모, 반북, 반민주노총, 반노동자주의, 반정파” 정당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동권과 데모, 정파, 민주노총 그리고 민주노동당으로 상징되는 87년 체제의 극복. 이름 하여 진보의 재구성. 그러나 내용 없는, 실패한 재구성. 결론적으로 반정립.
이른바 진보의 재구성은 정당의 운영원리나 정책 수준의 변화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87년 체제란 87년 이후 형성된 사회시스템 안에 있는 것이며, 87년 이후의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다양한 사회운동 등을 포함한 총체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사회적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한 경로로 ‘선거’ 이외에는 사고할 수 없었으며,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문제의식에 동의하지 않거나 노선적, 정서적 차이가 있는 제 운동 주체들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절연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낡은 운동과 절연했으며, 스스로도 변화시키지 못했으면서도 이른바 운동권과도 절연했다. 그 결과는 낡은 운동으로부터‘도’ 고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진보신당은 무엇을 했나?
많은 진보신당 당원들이 민주노총의 한계를 비판한다. 그러나 조직의 차원에서 보면 진보신당이 그토록 목 놓아 외쳤던 비정규직 문제를 가장 책임 있게 대응한 것은 실은 민주노총이었다. 1%를 간신히 넘는 비정규직 노조 조직률. 이랜드와 같은 상당하게 정치화된 영역을 제외하면, 우리 사회 다수의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한 것은 그토록 비판받는 민주노총이지 진보신당이 아니다. 최소한 우리 사회에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한 비정규 운동의 주체들은 비정규직 노동조합원들이었다. 반면, 작년까지 중앙당 비정규 담당자였던 나를 포함하여 진보신당이 한 것은 지난 전국위원회에서의 발언처럼 “비정규 연대기금 1억으로 플랭카드 만들자”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치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발언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끊임없이 주장한 것처럼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이며, 운동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의 과제는 그 대중운동과의 결합 속에서 나와야할 것이다.
노동조합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주장 역시 있어왔다. 맞다. 노동조합이 모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진보신당은 일상의 영역, 이른바 생활의 영역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를 “시혜와 동정”의 수준에서 발언하는 것 이외에 도대체 무엇을 했나? 계급 정치가 배제된 상황에서 진보정당이 걸을 수 있는 길은 탈계급적 공간에 탈계급적 방식으로 개입하거나, 아니면 탈계급적 공간에서 계급적 정치를 구성하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럴 때 진보정당이 취한 것은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탈계급적 전략이었던 것 아닌가?
민주노총과 관련하여 추가할 것은 이른바 “민주노총이 노동계급을 대표할 수 없다”는 논리다. 정말로 민주노총이 노동계급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표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설득하고, 비판하고, 견인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노총이 노동계급을 대변할 수 있는 진보정치를 구성하여, 민주노총이 스스로 그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10%에 불과한 조직률을 탓하는 것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프랑스 노총이 조직률이 높아서 2004년 최초 고용 투쟁의 주력부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른바 정치 운동이라면 기업별 노조체제에 갇혀 있는 노동조합을 사업장 밖으로 끌어내고, 나아가 기업별 노조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자기 과제로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무능하거나 무책임한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진보신당 왼편의 주장처럼 그저 ‘기름밥 먹는 것들이 못마땅한’ 중간계급의 정당에 불과하기 때문인가?
민주노총을 비롯한 당 밖의 대중운동 특히, 노동과의 문제만이 아니다. 진보신당은 당 내의 다양한 계급적 주체와 함께 하는데 무기력 했다. 예를 들어, 진보신당은 농민 당원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중소영세 당원들과는 무엇을 했을까?
진보신당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추가하고 싶은 것은 이를테면 노정태 같은 사람들의 주장이다. 신당원과 구당원. 촛불당원과 민노당 출신 당원의 차이. 그러나 이런 분석은 센세이셔널 하긴 해도 결코 현실을 드러내지도 현실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촛불 당원은 결코 하나가 아니며, 지난 1년 반의 과정 속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으며 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심상정의 선언 이후 벌어질 논쟁은 이러한 분화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당원과 신당원과 같은 과도하게 규정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촛불도, 시민도 하나가 아니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배타적 계급 정당” 즉, 노동계급만으로 구성된 정당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선거를 통한 사회변화를 부정하는 것 역시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고 긴 이야기를 한 것은 권력에 맞서 겨우 “시민”이라는 주체만이 서 있는 상황, 계급적 대중운동과 조직은 시민권조차 획득하지 못한 것은 물론, 대중정치 자체가 봉쇄되어 있는 상황, 이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진보정당의 미래는 없다고 주장 하고 싶기 때문이다.
당연히 진보정당은 중간계급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현 시기, 이른바 촛불로 상징되는 “시민”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심상정을 비롯한 일부의 주장은 이 시민들을 인정하면서 실은 그들이 하나가 아님을, 하나가 아닐 수 있음을 묵과하고 있다. 정치적 지지가 계급적 지위와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선거와 제한된 시민사회 공간을 통해 구성되고 호명되는 이른바 국민과 시민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균열이 존재하며, 다양한 계급적, 계층적 분화가 존재한다. 그러나 체제는 이들을 체제 친화적이며 탈계급적이며, 최소한 중간 계급적 주체로 제한하려 한다. MBC 파업을 지지하는 주체는 용인해도, 제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주체는 용인하지 않는 이른바 ‘선택과 배제 전략’은 문민정부 이후 항상적으로 존재해온 전통적 전략이다.
필요한 것은 시민과 노동의 연합, 즉 계급 연합이다.
이런 상황에서 탈계급적 관점에서의 시민을 지지 기반으로 삼겠다는 것은 그 계급배제, 대중배제 정치를 영속화하는 것일 수 있다. 중간 계급의 지지를 얻는데 급급해 중간 계급의 변화와 분화를 포기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중간계급과 하층 계급의 연대와 단결, 연합을 포기하는 것”이다. 연합을 말하지만 실은 “중간 계급 간의 연합”으로 결국에는 “정치화된 그들에 국한된 연합”을 주장하는 것이다.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의 공백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없는 한 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경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촛불과 시민은 결코 고정불변한 계급이 아니며, 영원히 보수 양당 체제에 갇힌 주체도 아니다. 그들 내부에서도 정치적 지향과 계급적 지위에 있어 다양한 분화가 있고, 있을 것이다. 노동계급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계급과 연대하고 있고, 할 수 있는 주체다. 사회민주주의적 변화를 위해서라도 진보정당이 해야 할 일은 “시민과 노동의 연합”이다.
중요한 것은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
이제와 나는 반성한다. 나는 과거 민주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른바 자주대오와 당을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아는 정당운동의 개념에 입각할 때 너무도 상이한 노선을 가진 두 세력이 함께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합법정당 노선을 계량으로 폄하한 것을 반성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제와 민주노동당과 함께 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의 합법정당 노선이 옳았다고 평가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반성하는 것, 어쩌면 우리가 반성해야할 것은 정당운동을 계급적 대중운동, 대중 정치의 관점에서 보지 못했던 점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 운동의 수준에서 어떤 당이냐 ‘만’이 아니라,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를 뿌리내릴 것”이냐며, 이 과제를 성공하지 못하는 한 어떠한 방식의 진보정당 운동이라 해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나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을 준비하고 있는 진보신당 왼쪽의 정치세력의 시도가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조직 노선이 무엇이든 간에 다양한 정치운동의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그 과정을 통해 계급대중을 정치화 시키는 데 주요한 일익을 전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려 말하면 어쩌면 현 시기에 더 중요한 것은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에 대한 입장과 계획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진보신당의 제 2창당
진보신당은 2000년 민주노동당의 재창당 운동과 유사한 문제의식에 입각한 이른바 제 2창당 운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왜냐하면 2000년의 재창당 운동은 좌우 동거라는 커다란 그림이 깔려 있었으나 현재의 제 2창당은 오른쪽을 뺀 왼쪽끼리의 제 2 창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00년의 재창당은 한국사회의 제 운동진영이 독자정치세력화라는 큰 흐름에 함께 복무한다는 대의와 명분, 그리고 비전이 있었지만 2008년 진보신당의 제 2창당은 “변화해야한다”는 주장만 있었을 뿐 명분도 비전도 없었다.
나는 진보신당이 또 다시 제 2창당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 정치의 형성”을 위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정파적, 정치적, 노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의 과제와 지향이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제 2창당을 넘어 최소한의 연대와 연합을 위해서도 그렇다. 그렇지 않을 때 진보신당은 결국 심상정의 제안한 길로 가거나, 혹은 심상정의 길은 아니지만 그닥 다르지도 않을 길을 걸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과적으로는 말이다.
진보신당, 이제 그만 내려오라
(나는 전진 토론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따라서 토론 내용을 알지 못한다. 또한 사민모임 토론회의 경우 토론문이 공개되지 않아 별도의 입장을 제시하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전진의 지난 주 토론회에서 장석준은 ‘비’노동 전략을 제안했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노동자가 될 ‘비(be)'노동자, 노동에서조차 배제된 가사노동 등의 ’비(非)‘노동자를 위한 정치.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비’노동 전략에는 여전히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를 위해 진보정당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관점과 계획이 빠져있다고 본다. 나는 장석준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장석준이 그 공백을 채워달라고 하는 것이다. 현재의 사회구조 안에서 ‘비’노동 전략 역시 탈계급적 공간에서의 탈계급적 정치활동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계급적 대중운동과 대중정치에 대한 지향과 계획을 자기 과제로 위치 지울 때에만 ‘비’노동과 같은 의미 있는 전략은 성공하게 될 것이다.
긴 글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렇다.
진보신당이여. 이제 그만 허공에서 내려와 대지에 발을 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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